딱히 여자얘들처럼 정리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반에 한명씩은 있는, 자대고 줄긋는 학생도 아니었는데
집요하게 작은 노트에 뭘 적어 넣는 재주 하나는 누군가 알아줄 필요는 없어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나는 집요함 빼면 시체 일테고 노트에도 집요함을 빼면 남는 것이 없을 거다.
책상은 항상 너저분해도 어딘가 꼬잇꼬잇 정리해둔 단어장이나 문서들이나 발견하면 당신이 가장 놀라한다.
새삼 이런면이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인지, 이건 이래놓고선 책상은 너저분해서 당신이 정리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배신감인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지우개도 하나 제대로 다 못 써버리는 인간인데 몇 십장을 다쓰고 여느 책들과 동등한 위치로서 책장을 차지하는 권수만 해도 벌써 여섯권. 처음 한두권은 기성제품을 사다 썼는데 책만드는 재미에 들리고서는 계속 만들어서 쓰고 있다. 점점 만족스러운 퀄리티가 나오고 있어서 그는 언제나 제 다이어리를 부탁하고 나는 간혹 스케치북을 만들기도 하고 사진첩을 만들기도 한다.
노트의 대부분은 낙서다. 그렇지. 낙서하면 김앵벌이다. 노트질과 낙서와 집요함은 김앵벌과 함께 시작했다. 집요하게 노래를 구웠고 교환하고 나눠들었다. 새벽내내 컴퓨터를 돌려가면서 노래를 다운받고 (자유로웠던 시절) 아침에는 따끈히 구워서 학교를 갔다. 음 그 노래를 들으면서 집요하게 수학문제를 풀었었지. 유일하게 음악들으면서 풀 수 있는 과목이라 가장 사랑했다. 야자시간엔 넬이 18세(하니까 왠지 야하니까) 17세 여고생의 맘을 한껏 흔들어놔서 중간중간 잠시 멈추고 전율을 느끼기도 했지만 고 짜릿한 시간을 숫자에게 넘길쏘냐.
김앵벌은 어느곳에나 낙서했다. 심지어 주고 받은 몇 십통의 쪽지는, 내 비록 그마만큼의 러브레터는 받질 못했어도!, 낙서였다. 아 물런 글이었는데 그녀의 글씨체는 워낙 독특하고 그 독특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낙서도 보인다. 그녀에게 바스키아를 소개해줬고 그녀는 지금 뉴욕에 있다.
둘다 붙임성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네이트온에서 만나도 시큰둥한 대화를 나누나 항상 뜬금없어도 언제나 이야기는 이어진다. 그녀는 찰리카우프만이 새로찍은 Synecdoche 영화를 꼭 보라고 하곤 나갔다.
미치도록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정재연이 미치도록이라는 단어를 발음할때의 표정은 너무 익살스럽다.
피필로티 리스트는 Ever is over all이란 작품에서 "우리가 정말 미치도록 열심히 살고 싶어 하는지.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당신의 몸을 던지고 있는지"를 물었는데 아 정말 미치도록 영상은 아름답고 문장은 풍부했다. 원제는 저래도 처음에 보았던 의역된 제목은 생의 약동은 어디에나 존재한다였는데 나는 내 노트에도 나의 생의 약동이 있길 바란다.